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동네가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대접하는 사람, 나의 상처가 아픈 만큼 남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 것 없는 자가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 나는 매사에 '내 돈을 써야 하는 일인가'만 생각하는 사람, 폭력적인 시선으로 남을 쳐다보는 사람, 남의 차에 가래침을 뱉는 사람, 욕설을 퍼붓고 악을 쓰는 사람이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누구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품위와 교양과 인격이 다른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태도였다.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끝내 화만 남은 이들에게는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웃들을 좋아할 수 없었지만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다.
🔖 에이드리언 리치가 디킨슨에 대해 쓴 에세이의 제목은 '집 안의 활화산'이다. 나는 디킨슨이 자신이 바라던 대로 방 안에서 자유로웠으리라고, 적막하지만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시간을 보냈으리라고 짐작한다. 누군가는 집 안에 길이 있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집 밖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나에게 두 문장은 다르지 않다. 몸을 집 안에 두고도 세계를 유랑하는 이들이 있다. 디킨슨처럼 아무데도 가지 않는 여행자를, 먼 곳을 떠도는 은둔자를 나는 흠모한다. 나의 방-작업실-서재가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이자 외부로 나가는 길이기를 바란다.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디킨슨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제 자유야."
🔖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